나는 째즈란 음악을 그다지 즐겨 듣지 않는다.


한마디로 관심이 거의 없는 것인데


예전엔 그냥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째즈란 음악을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혐오했었다. 단순히 그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하던 친구 까지 있었으니


가히 중증 째즈 안티였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쩌다가 그냥 단순히 음악일 뿐인  째즈를 


그토록 혐오했었는지는 나 자신도 잘 알수가 없다.


여하간 째즈란 음악을 무척 혐오했을 무렵에 나에겐 그 째즈란 음악이  딱 두 가지 감흥으로 다가왔었을 뿐인데....


첫째는, 지나치게 정신을 쏙 빼놓는 건방진 깜둥이 자식들 


둘째는,  지나치게 폼 잡고 늘어지며 옆에 있는 여자를 추행하려드는 사기꾼 흰둥이 자식들


이런 생각과 더불어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여하간 라디오에서 째즈만 나오면 내 기분도 덩달아 삐뚫게 째지는  그런  심각한


이유없는 째즈에 대한 심각한 혐오의 마침표를  찍게 된 계기는  


째즈란 음악이 사실은 장례식 행렬을 인도하는 음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부터다. 


뉴올리언스 흑인노예들이 뜨거운 태양을 아래에서 혹사당하다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을 때


같은 처지의 


가난한  흑인 친구와 인척들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악기를 손에 들고 혹은 입에 물고  


떠나는 이의 영혼의 발걸음을 가볍게 고통없이 춤추 듯이 인도해주는 것 밖엔 없었으리라


째즈란 음악은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뒤 이어 더 자세히 알게 된 흑인들의 차별의 역사를  통해서도


째즈란 음악은 그 야말로 고통으로 얼룩진 슬픈 음악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내가 혐오했던  비밥과 하드밥 프리 째즈의


정신나간듯한 건방짐과 흥겨운 스윙을 나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째즈란 음악이 흑인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시기는 이미 끝이 났고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태동한  웨스트코스트 째즈는 좋은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째즈라는 음악이 하나의 장르로 대중에게 인정받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로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중년 백인 아저씨의 느끼한 폼잡기가 바로 그것인데.


이젠 그 느끼한 폼이 싫지 않다.


아무리 폼을 잡는 대중적인  째즈라 할지라도  


그 중에서는 어둠과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는 음악들이 있기 때문이다.


병적으로 최후에 집착하지 않는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마지막이 두렵지만 또 어쩔 수 없이 행복한 것이다.



p.s


다시 읽어보니 지금은 내가 째즈를 엄청 좋아하게 된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지금도 사실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